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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상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상권

by 다올혜윰 2021.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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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상권

-. 종로 : 조선시대부터 한양의 중심상권

-. 북촌한옥마을 등 : 삼청동과 가회동

-. 서촌과 청운동

-. 대학로 :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캠퍼스와 서울대 연건캠퍼스

-. 인사동 전통문화거리

-. 통인시장 : 먹거리

-. 동대문시장 : 쇼핑과 패션의 중심

 

종로 1·2가의 야경. 종로타워 앞의 보신각과 종로

 

 

 

2. 종로

서울의 대표적인 번화가 중 하나이자 중심상권 밀집지구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도로이자 법정동/행정동 중 하나다. 서울특별시의 주간선도로이자 서울특별시 한강 이북 지역의 핵심 횡축도로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사거리에서 흥인지문을 지나 동대문구 신설동역에 이르는 연장 4.2km, 너비 35~40m(왕복 6~8차선)의 도로이다.

서욽특별시 종로구 종로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하고 계획도시로 건설되었던 처음에는 이 도로의 이름이 없었지만, 시전이 설치되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면서 운종가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후에 보신각이 있는 큰 도로라고 하여 종로라고 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종로 또는 운중가로 불린다.

종로의 각 법정동

 

 

'종로o가'와 같이 법정동 명칭으로 쓰이며, 행정동으로는 종로1·2·3·4가동, 종로5·6가동끼리 묶인다. 원래는 흥인지문까지만 종로이고 이후부터는 왕산로였으나, 2010년 도로명을 정비하면서 왕산로 중 종로구에 해당되는 흥인지문~신설동역 구간을 종로로 편입하여 현재의 구간이 되었다. 단 지명 및 법정동명으로서의 종로는 여전히 흥인지문까지며 실생활에서 쓰이는 종로 역시 마찬가지다.

 

종로의 과거와 오늘날의 모습

 

 

원래는 육조거리만큼되는 넓은 도로였으나, 육의전과 시전상인들이 계속 운중가에 머물게 되면서 자연히 도로가 좁혀졌고, 1974년에 현재의 너비로 확장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종로는 경성부의 중요가로로써 역할을 했으며, 일본인들이 대규모로 거주하여 번화한 중구의 혼마찌와 다르게 전통과 역사의 도로이자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이 집결하여 변화한 지역이다.

 

세종대로사거리~흥인지문에 이르는 종로의 지적편집도 (상업지역)

 

 

종각을 중심으로 광화문, 세종대로와 인접한 종로1·2가 동대문종합시장, 평화시장, 광장시장 등의 시장들과 흥인지문이 중심인 종로5·6가는 최중요 도심으로 기능하고 있고, 중심부인 종로3·4가는 개발이 멈춰 침체된 쌍봉낙타식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세종로와 태평로(현 세종대로)가 정치적 중심지라면, 종로는 경제적 중심지로 부를만 하다. 실제로 종로의 하루 유동인구는 무려 150만 명에 이를 정도다.

 

 

 

@세종대로와 가까운 서쪽

종로타워 및 로댕 갤러리, 높은 오피스빌딩 등이 밀집해있는 상당한 번화가이며, 여러 대기업의 본사(교보생명, SK그룹, 한화그룹)가 위치한다.

 

@동쪽 (동대문패션타운관광특구)

의류상권인 동대문시장이 약 17만평 규모로 국내 최대 패션 관광특구다. 주로 동대문시장, 동대문 패션타운 등으로 불린다.

동대문패션타운관광특구

 

조선시대 남성이 징집될 경우 군복을 스스로 준비해야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군포를 가지고 동대문 시장 근처에서 옷을 지어입었다. 1905년에 김종한 외 3인이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동대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상호를 등록하면서 국내 최초의 근대 시장으로 개장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배오개시장으로 불렸는데, 노면전차 노선이 생기고 6.25전쟁 이후 근처에 평화시장 등도 생기면서 상권이 더 커져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의 양대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1990년대 팀204가 들어선 이후 현대화된 복합시장단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동대문길을 따라 다수의 패션쇼핑센터가 들어서면서 현대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2020년5월23일에 동대문패션타운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동대문시장은 '동대문 패션타운'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전국으로 나가는 의류도매시장과 현대식 복합쇼핑몰이 공존하고 있다. 총 31개의 상가에는 약 3만여 개의 점포가 자리잡고 있다. 도매시장 특성에 따라 20여개의 시장은 야간에 운영한다. 원단에서부터 완성품 세트에 이르기까지 옷에 관련된 모든 과정들과 중간 제작물, 결과물들을 동대문 시장 한 곳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는 것이 특징으로, 온라인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도 모두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일명 동팔이라는 일부 악덕 상인들 때문에 안좋은 추억을 가진 사람들도 종종 있으며, 2010년대 들어 인터넷쇼핑몰과 SPA 브랜드가 부상하고, 대형 의류 업체들이 아울렛 매장 등으로 가격 공세를 벌이면서 용산전자상가처럼 예전보단 위세가 줄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방해받지 않고 편하게 옷을 고를 수 있는 인터넷 쇼핑몰과 SPA 매장으로 가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특히 해외의 SPA 브랜드가 대거 진출한 2011년 이후부터 동대문 의류시장의 침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외 동대문 패션쇼핑몰들의 자체적인 경영, 마케팅 능력이 부재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다보니 폐건물들이 많이 생겼었는데, 그나마 2010년대 중반 이후 대기업들이 이곳에 투자하면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소매판매보다 중소형 온라인 쇼핑몰에 대한 도매업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

 

침체하고 잇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국내외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다. 시장 종사자만 약 15만 명이며, 1일 유동인구 100만명, 1일 총 매출액이 약 500억원, 연간 외국인 방문객 약 800만 명이다. 특히 국내에서 외국인들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장소 중 한 곳으로, 한국에서 아마도 면적 대비 가장 많은 외국인들이 있는 곳 중 하나일 것이다. 의류 쇼핑을 하러 온 중국인, 일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남아시아 및 서양인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홈페이지에서는 중국어를 비롯한 외국어 안내를 제공하기도 한다. 근처에는 러시아인과 몽골인, 그리고 우주베키스탄인 등도 많이 거주하며 그들이 운영하는 음식점도 많이 있다.

 

 

 

@종로의 중앙

종묘나 탑골공원 주변은 개발제한과 여러 요인으로 인해 굉장히 낙후되었다. 이 부근은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관인 단성사, 악기상권의 중심지인 낙원상가, 외국인도 워낙 잘 아는 인사동, 종묘 건너편에 있는 전자제품 상가인 세운상가 등이 위치한 나름대로 번화한 곳이었다. 그러나 최근 상권이 침체되면서 낙후된 채 방치되고 있고, 그나마 인사동만이 관광지로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다.

 

#탑골공원

서울의 도심 사찰이었던 원각사 터가 있는 곳으로, 원각사 터 위에 세워진 공원이 탑골공원이다. 탑골공원은 3.1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며, 보신각에서 멀지 않은 종로타워 뒤쪽의 센터마크호텔 근처에는 태화관(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모인 요릿집) 자리가 있다. (현 태화빌딩) 종로와 그 주변에 있는 명소만 꼽아도 열 손가락이 넘칠 정도다.

 

#청계천

청계천이 종로 남쪽을 따라 나있다. 사실 종로 자체가 청계천에 맞춰 동서축으로 조성된 거리로, 엄밀히 말하자면 청계천이 종로를 따라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종로가 청계천을 따라난 것이다.

 

#피맛골

종로와 연결된 작은 골목들 중에는 피맛골이라는 조선시대 때부터 서민 전용이었던 맛집 거리가 있었으나, 재개발로 인해 철거된 구간이 상당히 많다. 남아있는 종로 일대가 전체적으로 맛있고 싼 밥집이 널려있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서울지하철1호선

1974년에 서울지하철1호선이 처음 뚫릴 때 이 도로를 따라 뚫렸다. 그래서 서울 지하철1호선을 '종로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울시의 1기 지하철 계획은 과거 서울의 단핵도심이었던 종로를 중심으로 설계되었으며, 현재도 길이에 비해 많은 수의 지하철이 종로를 지나가고 있다.

 

@종로3가 뒷골목

대한민국의 가장 오래된 슬럼 중 하나로 손꼽힌다. 한국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발상지인 셈이다. 1960년대에는 홍등가(종삼)가 있었고, 1980년대 헤비메탈의 산실이었던 파고다극장이 있었으며, 그 일대에 자리잡기 시작한 게이바가 2010년대까지 이어져 많이 위치해있다.

종로구 익선동

 

 

다만 2010년대 후반 들어 3가 지역 북쪽으로 연담된 익선동이 새로운 문화적 핫플레이스로 급부상해 임대료와 물가가 급상승하는 등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했고, 2020년들어 코로나19로 인한 자영업자 위기까지 겹쳐 해당 상업시설들의 존립에 빨간불이 켜져 실제로 몇몇 업소는 문을 닫기도 했고 몇몇은 업장이전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익선동한옥마을

매우 오래된 한옥 밀집지역으로 약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한옥마을로 지정된 익선동165번지 일대는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사저 '누동궁'자리였다. 그러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대한제국이 망해버렸고,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된 전계대원군의 현손인 청풍군 이해승이 1930년 누동궁 부지를 팔고 현재의 홍은동으로 이사갔다. 그리고 부지는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에서 부동산개발업자이자 민족운동가로 활동하던 정세권 선생이 사들였다. 당시 정선생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강력히 반대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사람이었다. 이 당시 일본인들이 익선동 등에 서울 사대문 안 곳곳에 침하려하자 1만평에 가까운 익선동 땅을 작게 나눠서 15평 미만 규모의 작은 한옥들을 다닥다닥 지어 조선인 서민들에게 분양했다. 시기상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한옥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개량한옥이었다. (평수가 작은 익선동과 달리 북촌의 한옥은 크기가 좀 큰 편인데, 북촌은 중산층 이상의 부유층을 위한 집들이 많았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익선동은 서울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한옥 밀집촌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한옥이 모두 쇠락해졌고 주변 종로 상권이 개발됨에 따라 이 지역도 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래서 서울특별시가 2000년대 초반 기존의 한옥을 모두 헐고 재개발 사업을 시행해 아파트 단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재개발 계획은 10여년을 표류하다 결국 무산되었다. 이는 익선동 지역의 상업화와 연결된다.

 

대략 2010년대 중반부터 익선다다를 시작으로 개발업체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서 한옥 일부를 개조한 뒤 액세서리점이나 작은 카페 등을 만들어 영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상권이 발전하면서 젊은 소상공인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한옥의 주인들은 상인들에게 점포를 내어주고 월세를 받는 생활에 적응하다보니 재개발 계획에 반대했다. 더구나 SNS문화가 발달하고 익선동 일대 한옥에서 각종 영화나 드라마, CF 촬영이 자주 이루어지면서 익선동이 서울 도심의 새롭게 뜨는 데이트코스이자 관광상권으로 부상했다. 특히 2010년대 후반에는 뉴트로 신드롬 덕분에 익선동의 인기는 더욱 급상승했다.

 

결국 2018년1월 재개발 계획을 세웠던 서울특별시가 재개발 계획을 철회했고 기존 한옥촌을 '한옥밀집이겨'으로 지정해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초 서울시는 익선동 한옥마을을 전통문화 관련 용품점 밀집지역이나 게스트하우스 등 한옥 체험업 중심지역으로 육성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미 익선동에 들어온 상업화의 바람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다보니 서울에 현존하는 한옥마을 중에서 익선동은 가장 극단적으로 상업화된 곳이 되고 말았다. 상권이 발달하는 동안 익선동의 집값도 상승했고 그 영향으로 인해 상점 임대료도 올랐기 때문이다.

 

@특징

건물 외형만 한옥을 유지하고 내부에는 상업시설 입주를 위해 개조한 곳이 많다. 이 한옥들의 리모델링이 전통 한옥의 건축 양식과 현대 건축 양식의 조화를 통해 이뤄졌다면 더 호평을 받았겠지만, 대부분 사업을 하기 편한 구조로 마구잡이 리모델링이 이뤄진 곳이 많다. 더구나 지붕만 한옥의 기와지붕이고 벽체부터는 근대의 건축 양식을 따른 곳이 많다. 

 

익선동의 중심에는 전통 액세서리 전문점 등도 있지만 대부분은 SNS의 인기를 타고 핫플레이스로 성장한 식당이나 카페가 대부분이다.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나 맛집 페이지 글을 통해 익선동의 유명 식당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웨이팅이 긴 이유는 그 집이 맛집이라서기보다도 한옥마을 크기 대비 관광객이 너무많아서이며, 비주얼로 입소문을 타서 웨이팅이 긴 경우가 많다. 

 

북촌한옥마을이나 서촌한옥마을 등 고궁과 연결된 다른 한옥 밀집지역은 한복차림으로 오가는 관광객이 많지만, 익선동은 2010년대 후반에 익선동 개발업체가 들어서서 상권을 개발할 당시 뉴트로 붐을 타고 개화기 경성 콘셉트의 상점을 많이 만들면서 이쪽에 관심을 가지고 오는 관광객들이 많다. 이 영향인지 익선동 내 가게 이름 중에는 유독 서울의 일제강점기 시절 지명인 '경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많으며, 개화기풍 의류 대여점이 몇몇 들어서서 일제강점기 초기에 유행항 양장차림으로 다니는 이들이 꽤 있다.

 

익선다다나 글로우서울과 같은 익선동 개발업체가 고객(사업자)의 의뢰를 받아 전문적으로 한옥을 사들여서 브랜딩 작업을 한 상점들이 많다. 이들은 도시재생과 거대 자본의 상권 잠식 방지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결국 이들의 목적은 철저한 상업화를 통한 이윤 추구이며, 이러한 사업을 통해 상권을 발전시켜 익선동이 젊은층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음 등으로 인근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임대료 상승으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원주민들을 떠나게 만들었다. 양식레스토랑 등 한옥마을의 컨셉트와는 동떨어진 상점을 만들어서 오랫동안 익선동이 가지고 있었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한옥과 한옥 사이의 거리가 매우 좁은 골목 동네인 탓에 자가용으로 익선동을 찾는 사람들은 주차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차를 댈 수 있는 식당이나 카페는 아예 없다고 봐야하며, 그나마 낙원상가와 인접한 외곽 지역의 상점은 주차가 가능하지만 이역시 공간이 매우 협소하다. 종로3가역 6번 출구와 익선동 입구가 멀지않은만큼 지하철을 이용하면 훨씬 편리하게 익선동 거리를 오갈 수 있다.

 

 

@구역

익선동 상권구역도

빨간색으로 표시된 경계가 서울특별시에서 지정한 익선동 한옥마을 구역이다. 분홍색으로 표시된 수표로28길과 남보라색으로 표시된 돈화문로11다길 부근이 상권이 가장 많이 발달해있다. 이 외 구역은 노포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3. 대학로(혜화)

문화적인 중심지

서울특별시의 간선도로 중 하나이자 그 주변 일대의 번화가를 지칭하기도 한다. 도로의 기점은 종로구 종로5가역, 종점은 혜화동 로터리다. 종로5가역~이화사거리 구간은 폭20m의 왕복 4차선이고, 이화사거리~혜화동로터리 구간은 폭 40m의 왕복 6차선이며, 총 연장은 1.6km이다.

대학로(종로5가사거리~혜화동로터리)

 

 

 

원래는 경성국제대학 법문학부가 위치해있던 동승동과 의학부가 있던 연건동을 가로지르는 도로였다. 이후 서울대학교의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이 소속되어 있었던 서울대학교 동숭캠퍼스가 원래 이 곳에 있었기에 정식으로 붙은 이름이다.

 

즉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가 생기기 전, 서울대 문리과대학 및 본관 건물이 위치했던 곳이라고 붙여진 것이다. 현재도 대학로라는 이름에 걸맞게 많은 대학들(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배화여자대학교, 상명대학교,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캠퍼스, 한국방송통신대학교)가 대학로 및 그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 대중교통으로 오갈 수 있는 거리에 동국대, 성신여대, 고려대도 있다.

 

당시의 대학로는 왕복4차로에 동숭동쪽으로 개천이 있었는데, 사실 이 개천은 북악산의 남쪽 사면을 흘러내려와 청계천에 합류하는 하천인 훙덕동천이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그 훙덕동천을 세느강으로, 문리대 본관쪽으로 연결된 다리를 미라보다리라 불렀다.

 

현재의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가 경모궁이 있던 위치이고, 전 문리대인 마로니에공원을 잇는 다리라서 이 미라보다리는 사실 조선시대 응란교이다. 서울대 관악캠퍼스가 새로 생겨서 문리대 등이 관악캠퍼스로 이전을 하고, 1981년 서울지하철 4호선 공사를 하면서 개천은 복개되어 지금의 왕복7차로 대학로로 확장되었다.

 

대학로라는 공식적인 도로명이 붙은 것은 1965년이다. 많은 자료에서는 1985년부터 대학로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1985년은 대학로가 문화거리로 지정된 해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대학로라 칭하는 기록이 있는 만큼 비공식적으로는 경성제대 시절부터 대학로라고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1955년에 이 일대를 관할로 한 대학동이라는 행정동도 있었으나, 1970년에 서울시내 행정동이 대대적으로 정리되면서 사라졌다.

 

1985년부터 4년간은 주말에 차량통행을 금지시켜 차 없는 거리에 갖가지 문화공연을 열어 젊음과 낭만의 장소로 만들고자 했으나, 지나친 음주 행위와 각종 사고로 인해 1989년 차량통행 금지조치가 없어졌다. 대신 대명거리 바로 옆의 소나무길이 비슷한 의도로 주말에 차량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 연건캠퍼스의 건물들을 제외한 구 서울대 건물 중 일부는 연극 공연장 등 예술 관련 시설로 쓰이고 있다. 대학로는 특히 여러가지 문화공연 등을 접할 수 있으며, 가끔은 아예 도로를 막고 콘서트를 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시대부터 이곳이 현재와 성격이 비슷한 장소였다는 것이다. 과거 성균관 주위에는 성균관에 쇠고기를 제공하거나 잡일을하는 백정, 즉 반인들이 모여사는 반촌이라는 동네가 있었는데, 이들은 성균관 출신 관료들의 비호를 받아가며 성균관 유생 등을 상대로 반촌 일대를 화려한 유흥가 지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대학로의 서편인 성균관로와 소나무길 일대가 과거 반촌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대명거리 입구엔 이를 짧게 설명하는 안내석도 있다. 또한 대학로의 동편인 혜화동과 동숭동 일대는 갖바치들(조선시대 가죽신 따위의 가죽 물건을 전문적으로 만들어 팔던 사람)이 많이 모여살았다고하니, 나름 조선시대 한양에서는 지금의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과거 압구정 로데오거리 등 처럼 당시 패션을 주도했던 곳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왁자지껄한 거리라는 인상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대학번화가의 쌍두마차

신촌 일원과 더불어 대학들을 끼고 있는 대학 번화가의 쌍두마차로, 홍대 못지 않은 젊음의 활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다만 분위기는 대학로쪽이 연극 극장과 같은 예술 시설들이 많은 덕분인지 클럽이 많은 홍대에 비해 좀 더 쾌적한 편이다. 그리고 근처에 고궁과 종묘가 있는지라 장년층도 은근히 자주 보인다.

 

창경궁이 바로 옆에 있고, 창덕궁과 종묘도 도보로 2~30분 거리로 그다지 멀지 않다. 옛 것과 새로운 것의 혼재를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가+도심권 = 대상권

명동, 신촌, 홍대와 함께 서울 강북의 손꼽히는 상업지역으로, 대학로 주변에 온갖 음식점들이 많다. 2010년대 이후부턴 라멘과 돈부리를 위시한 일식집도 많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홍대, 신촌의 아성을 뒤잇는 밀집지가 되었다.

 

대학가답게 가격대도 인근 도심부보다는 그나마 양심적인 편이지만, 이곳 역시 번화가인지라 물가가 만만치는 않다. 그래서 아예 물가가 상대적으로 싼 성신여대입구역 주변에서 노는 사람도 있다. 그 외 카페나 노점상도 많아 대명거리부터 대학로 일대를 걸어보면 분식이나 달고나 같은 것을 파는 가판대가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 연극계의 메카

영화의 메카인 충무로와도 거리가 가깝다. 말하자면 한국의 브로드웨이격으로 연뮤덕들의 천국이다. 동숭아트센터 등에서 하루에도 수십 편의 연극이 공연되고 있는 곳이며, 이곳에서 연기 경험을 쌓아 데뷔한 배우나 개그맨들도 대단히 많다. 다만 건물 임대료 등이 크게 오르면서 이를 감당하지 못한 연극인들이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드는 성북구쪽으로 극장을 옮기는 사태도 발생하고 있다.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공연만 대학로에서 하고 연습실이나 극단 사무실은 인근 한성대입구역에 위치시킨 극단도 많았다. 버스킹 공연도 활발한 지역으로, 주로 마로니에공원이나 대명거리 입구, 소나무길 등에서 버스킹을 한다.

 

 

@대학로 인근 (혜화역 옆)

혜화동의 이름은 서울특별시의 4소문 중 하나인 혜화문(동소문)에서 따왔다. 혜화문은 이 역과 한성대입구역 사이에 있다. 혜화라는 지명보다는 대학로라는 거대상권이 위치한 곳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곳이다. 이 때문에 지역사회에서는 지속적으로 혜화역을 대화로역으로 바꿔달라고 역명 변경신청을 넣고있지만, 서울시 지명위원회 측에서 이 건이 올라올 때마다 기각하고 있다.

 

역1번 출구로 나가면 성균과대 인문사회과학캠퍼스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탈 수 있는데, 도보로는 20분이나 걸어 올라가야하기에 버스를 이용할 것을 추천한다. 역3번 출구 방면으로는 대한민국의 통신관문국이라 할 수 있는 KT혜화지사로 갈 수 있다. 역4번 출구 방면으로는 성대사거리를 중심으로 전형적인 대학 근처 번화가이지만, 마로니에공원을 중심으로 1,2번 출구 방면에는 130여 곳의 소극장들이 모인 연극의 거리로 유명하다. 연극공연의 메카라 불릴 정도로 배우나 개그맨 또는 지망생들이 많은 공연을 치르는 곳이다. 다만 이곳도 최근에는 임대료를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씩 극장이 사라지는 등 점차 입지가 나빠지고 있다. 2015년 여름 기준으로는 이미 몇몇 극장이 성북동 근처 혹은 아예 강원도까지 가는 등 속속 철수하는 분위기다.

 

사실 혜화동 전체가 전반적으로 임대료나 월세가 비싼 편이다. 혜화에서 자취하는 대학생들입장에서는 상당히 고달픈 노릇이다. 비슷한 품질의 방을 한성대학교쪽이나 안암동 등 다른 지역에서 구하면 보증금이 반토막 혹은 그 이하로 난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유명한 번화가인것치고는 5층 이상의 고층건물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최근엔 상황이 살짝 나아진 편이다.

 

유명한 대학로가 있다보니 성균관대학교 학생을 비롯해 수많은 20대 젊은이들이 모이는 장소라서 상권이 비교적 발달하였고, 근처에 서울대병원 및 창덕궁, 창경궁, 성균관, 낙산공원, 동소문이 인접해있어 꾸준히 고정 수요를 모으는 곳이다. 특히 홍대거리에서 밀려난 예술인들의 상당수가 혜화역 인근에 자리를 잡으면서 새로운 예술촌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런 면을 보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승객이 큰 폭으로 감소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인다. (혜화&성북 등지에서 오래 사신 분들에 의하면 과거에 젊음의 거리를 꼽으면 으레 대학로를 뽑았다고, 그러다가 홍대거리에 그 자리를 내준 과거의 예술촌이 다시 새로운 예술촌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명거리 (대학로~창경궁로 사이)

대명길

종로구 혜화동·명륜2가·명륜4가를 잇는 길로, 길의 이름은 과거에는 대학로의 과거 지명인 '반촌'에서 따와 반촌길이라고 하였다가, 2000년 성균관 유생들이 풍류와 여가를 즐기던 곳이라하여 전통 명칭인 '대명거리'로 하였고, 도로명 정비에 따라 대명길이 되었다.

 

여러 대학들이 밀집된 대학가 답게 20대들이 많고, 서울 북부 인구가 꾸준히 유입되어 유지되는 상권이다. 4호선 혜화역 위쪽으로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분위기 상권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쪽에 사는 대학생들은 미팅을 한다든지 할 때 대학로로 많이 온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서쪽(대명거리)는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분위기이며 동쪽의 마로니에공원 방향은 운치있고 신선한 분위기다. 

 

유동인구 측면에서 메인 스트리트는 대명거리쪽이라 할 수 있다. 4번 출구 바로 앞 베스킨 라빈스 부근은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명소로, 음악인이나 스트릿댄서 등의 버스킹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더 과거에는 혜화역 안에서도 장르불문하고 공연하는 팀들이 있었다. 특히 저녁시간만큼은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마로니에공원 쪽은 소극장들이 몰려있는 연극계의 메카지역이기 때문에 연극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

 

이쪽 역시 규모 작은 신촌이라 불릴 정도로 대학가답지 않은 물가를 자랑하기 때문에 주의해야하고, 저물가를 원하다면 발품을 좀 더 팔아서 성균관대입구 쪽이나 아예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한성대입구, 성신여대입구, 안암동 쪽으로 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소규모상권

혜화로터리 인근, 방송통신대-홍익대대학로캠퍼스 등에 위치함.

 

@성균관로 주변

대학로상권의 일부라기보다는 성균관대상권으로 별도로 보는 경우도 있다. 분위기가 대학로와는 제법 다르다. 오히려 고려대 인근과 비슷하다. 성균관로 주변은 좀 옛날 대학가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성균관로 위쪽으로 올라가면 서울 시내에서 가장 오래되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몇 안되는 재래시장이 남아있다.(명륜시장) 이 시장에는 여전히 돈없는 대학생들의 배를 채우기 좋은 싼 식당이나 싼 술집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물가가 오르고 대학로 상권이성균관대 정문쪽으로 올라오면서 시장 내 가격도 점점 상승 중이다. KT 앞에서 성균관대 정문쪽 + 유림회관 반경 50m 지역까지는 아예 대학로 상권과 물가가 같다고 봐야 하며, 예전에 그렇게 많지 않았던 대형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세렌디피티, 테이크파이브)도 들어와있다.

 

성대사거리에 티플러스와 GS왓슨스가 자리한 건물이 있었으나 건물이 통째로 세븐스헤븐(현 Kings Bean Coffee)로 바꾸었고, 이후에 1층에 롭스가 입점하게 된다. 대신 성균관대 정문으로 올라가는 길에 올리브영이 하나 더 생겨서 왓슨스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성대 정문으로 올라가다보면 개입사업자들이 운영하는 테이크아웃 카페가 입점해있고, 정문을 지나 삼거리에서 쪽문 방향으로 올라가면 저렴한 식당+쥬시 같은 음료 가게 등이 많이 있다.

 

쪽문진입 전 볼 수 있는 유림회관 옆 골목에는 곱창, 치킨 등을 파는 술집이 쭉 늘어서 있다. 삼거리에서 쪽문 방향인 왼쪽으로 가지 않고 직진하여 좌회전하면 성북구의 한양도성의 혜화문과 숙정문 사이 구간, 서울과고, 서울국제고 방면으로 갈 수 있다.

 

 

 

 

예전에 서울대 동숭동캠퍼스 지역은 학교가 이전하고 구획 정리를 잘 해놔서 상가 건물을 네모반듯하게 짓기 쉬운 관계로, 넓고 개성있는 건물들이 많아서 당연히 임대료도 비싸며 그에 걸맞는 높은 가격대의 업종이 들어와있다. 다만 이 일대는 북촌이나 홍대거리와 같이 전형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의 모습도 보인다. 반면에 예전 주택가였던 곳은 대지 특성상 건물 상태가 좀 떨어지면서 상대적으로 혜화역에서 먼 탓에 임대료도 저렴하고 업종도 그에 맞는 업종이 들어와 있다.

 

#마로니에공원

1975년 서울대 문리대와 서울대 법대가 관악구로 이사가면서 그 부지에 조성된 것이 바로 마로니에 공원이다. 서울대가 떠나면서 본래는 고층아파트를 세우려고 했으나, 학교와 사회 각계의 반발로 공원 부지로 돌렸다고 한다.

 

#낙산공원

마로니에공원에서 동쪽으로 걸어가면 낙산공원이 있는데, 과거 해방 이후에는 시민아파트 중 하나인 낙산시민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되는 등의 원인으로 낙산시민아파트가 해체된 후 일대의 낙산 성곽을 복원하여 지금은 시민공원이 되었다.

 

#시위 거점지

대학생들이 많이 모이던 특성상 1987년 6월항쟁 시기에는 주요 시위 거점이기도 했다. 서울대학교가 1975년에 동숭동에서 관악산 기슭으로 옮긴 것도 이와 관련 있다는 해석이 있다. 서울 시내와 매우 가깝고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대학로~동숭동 일대보다는 당시만해도 산골짜기인 관악산 자락이 학생 시위를 진압하는데 더욱 쉬웠기 때문이라고 ...

 

#매주 일요일 혜화로터리

필리핀인들이 길거리 시장을 열고있다. 필리핀은 천주교 신자가 대부분이라 인근에 위치한 천주교 서울대교구 혜화동 성당에 모여 미사를 드리고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길거리 장터가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혜화로터리에 있는 우리은행 혜화지점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일요일에도 업무를 본다. 한국인을 상대로 영업하지는 않고 혜화동 성당에 모이는 외국인 노동자의 송금 편의를 위한 것이다.

 

#학림다방

드라마 별에서온그대에서 도민준이 애용하던 다방으로 나와서 더욱 유명해진 곳으로, 1956년부터 영업하고 있는 오래된 다방이다. 학림다방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제25강의실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진아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음식점으로, 원래 주인은 70년대에 가게를 팔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이후 재개발 및 지대 상승 문제로 2번이나 이사했지만 새 주인이 명맥을 이어서 계속 영업 중이다.

 

#중국문화(마라탕)

성균관대에 중국 유학생들이 많이 다녀서 그런지는 몰라도 혜화통 로터리쪽에 중국어 서적을 파는 화문서적이 중국어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나름 유명하다. 그리고 2010년대부터 성균관대 앞을 중심으로 마라탕, 마라샹궈, 꿔바로우, 훠궈 등의 중식 요리를 파는 곳이 늘어났다.

 

 

 

 

 

4. 북촌한옥마을 (가회동)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삼청동 내의 한옥 밀집지역을 칭한다. 편의상 그 일대를 북촌이라 부르지만 엄밀하게는 가회동, 계동, 화동 등 일부 법정동만을 포함한다. 

북촌한옥마을

서울 북쪽에 위치한 한옥동네라는 뜻으로 조선왕조 때부터 왕족, 양반, 관료 출신들이 살았던 고급 가옥이 대부분이라 일각에서는 '양반촌', '양반동네'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 때 한옥이 일부 증개축되고, 1992년 가회동 한옥보존지구에서 해제되면서 한옥 이외에도 일반 건물들이 들어섰다. 특히 원서동은 업자들이 유혹해 빠르게 빌라가 들어서면서 이전의 풍경을 잃었다. 2001년 서울시가 '북촌가꾸기사업'을 진행하여 한옥과 주변 경관을 개선해 2009년 유네스코 아태문화유산상 우수상을 받았다. 지금 남아있는 한옥들은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이 살던 한옥들이 아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개량한옥들이다.

 

사실 북촌한옥마을, 서촌의 한옥 등은 모두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정세권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디벨로퍼라고 불리우는 부동산개발업자인 정세권씨가 조성한 한옥대단지인 셈이다. 경남 고성 출신 정세권은 1919년에 상경한 뒤 건축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서울(경성)은 급팽창하고 있었는데, 지방 빈농의 유입도 급증하고 일본인의 서울 이주도 급증하던 시기였다. 인구 증가는 주택난을 불렀다.

 

당시 청계천 남쪽에는 일본인들이 주로 모여살았는데 일본인들이 증가하자 청계천 북쪽으로까지의 확장을 노렸고, 총독부는 정부기관을 국공유지에 먼저 들인 후 일본인을 진출시키는 방식으로 청계천 북쪽으로 일본인 거주 확장을 주도하였다. 당시 북촌은 일제침략으로 어려워진 권세가들이 내놓은 집들이 많았는데, 정세권은 조선인의 영역을 지키고자 조선인 건설업자들과 함께 민간주택 건설 사업에 진출하였다. 권세가, 귀족들이 소유하였던 넓은 토지나 택지를 쪼개어 여러채의 작은 규모의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함으로써 조선인 주거지역을 확보하고 고유 주거방식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한옥 집단지구에 공급된 한옥은 전통한옥의 구조를 ㅁ자 안에 집약하고, 부엌과 화장실은 신식으로 개선하는 등 근대적인 편리함과 생활약식을 반영한 도시한옥(개량한옥)이었다. 소규모 도시한옥은 날개돋친 듯 팔렸다. 상대적으로 낮은 집값이 한몫했다. 정세권의 회사인 건양사는 한 해 평균 300채의 한옥을 공급했는데, 1920년대 한성(서울)의 연간 주택공급량은 1700채 정도였고, 정세권은 그 중 20%를 담당했다. 경성의 '건축왕'이라 불리었고, 북촌 한옥의 대부분은 정세권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세권은 경성 한옥단지 개발로 10년도 안되어 부동산 재벌이 되었다. 그렇다고 돈 버는데에만 집착하지 않고,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자 정세권은 경성지희 설립을 주도하였고, 좌우 독립운도 연합체인 산간회 운동에도 참여해 재정 담당을 맡아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어학회의 최대 후원자이기도 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기도 하였는데, 해방 후에도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사업 후원을 이어갔다.

 

 

@특징

한옥의 대부분이 팔각지붕을 한 기와집이며 대부분의 구조는 평면이 'ㄷ'이나 'ㅁ'모양으로 된 도시형 한옥구조이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마당이 노출된 전통 한옥과 달리 길에서 보면 높은 대문과 방으로 막혀 집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2000년대들어 개축하지 않은 한옥들에서 흔히 볼 수 잇으나 한옥 개축을 장려한 터에 최근 지은 한옥은 전형적인 도시한옥에서 많이 벗어났다. 

 

@문제점

북촌지역은 거주지역으로 엄연히 사람이 사는 곳으로 관광화된지도 불과 10여년 밖에 안되었다. 그러나 관광객 입장에선 그저 돌아다니면서 보고 즐기는 관광지일 뿐이기에 문제가 되고 있다. 주로 동대문과 면세점을 뺑뺑이 돌리는 저가중국여행사들이 비용을 낮추기 위해 무료인 북촌을 애용하고 있는데, 가보면 거주민보다 한복입고 사진찍는 외국인이 더 자주 눈에 띈다. 이 때문에 여러 마찰이 발생하게 된다. 분명히 차도임에도 거주자 차량이 관광객 때문에 통행하기 어려워진 상황이다. 소음문제의 경우 민원이 많이 들어오다보니 시에서 침묵관광을 해달라는 팻말을 여기저기 부착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는다. 또 쓰레기 무단투기도 아주 심각하다. 

 

2001년부터 6여년간 했던 북촌가꾸기사업도 또 다른 문제점을 낳았는데, 마을 정비에 따라 지가가 1억원 근처까지 치솟아 원주민들이 떠나고 그 자리에는 재벌집 등 금수저들이 터를 잡았다. 더 나아가 개조된 한옥도 콘크리트를 쓰고 내부까지 현대식으로 만들어 한옥 그 자체의 정체성을 잃기도하였으며 투기도 빈발했다. 이에 따라 영국인 거주자 데이비드 킬번이 한옥 원형보존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3. 삼청동

조선 후기 '산과 물, 그리고 인심'이 맑다는 의미에서 삼청동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치의 1번지로 불리는 곳으로, 대부분 주거지가 부촌에 해당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다. 중앙을 관통하는 삼청로를 중심으로 삼청동 카페 골목이 있어서 북촌한옥마을이 있는 바로 옆 가회동과 더불어 젊은이들에게는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다. 상대적으로 주거지는 많지 않은 편이다. 

 

#삼청동카페골목

 

 

 

 

4. 서촌

서촌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의 사이의 청운효자동, 사직동 일대를 일컫는 지역이다. 조선시대에 장의동 혹은 장동이라 불리웠으며 왕족과 사대부, 중인들의 거주지로 유명했다. 현대에 들어선 청와대가 인접한 탓에 개발의 혜택을 보지 못했다가 90년대 말 건축 규제가 완화되면서 빌라가 많이 들어서게 되었다. 최근엔 한옥과 같은 전통가옥들의 가치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한옥 보존의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북촌이나 인사동과 같은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관광지로 부각되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고 있다.

 

#통인시장(기름떡볶이), 대오서점

 

#수성동계곡

옥인동 인왕산 동쪽 자락의 계곡으로 조선시대 때 이 일대는 수성동이라 불리었다. 수성동계곡은 근교 선비들의 휴양지로 또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에 소개되는 등 명승지로 유명했었는데, 특히 아래의 정선의 산수화 "수성동"에 등장하면서 더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계곡이 크게 훼손되었지만 2011년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면서 복원을 시작하였고 예쩐의 자연 계곡 모습을 많이 되찾았다.

수성동계곡

역사적으로 조선시대에 서촌이라는 명칭을 쓴 곳은 서소문 일대여서 이곳을 서촌이라고 부를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역사학자 및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었다. 이에 종로구 지명위원회는 2013년 이 지구의 공식 명칭을 '세종마을'로 의결했다. 그러나 2017년 한옥체험관을 '상촌재'라 명명하며 이 지구의 옛 이름이 '상촌(웃대)'라고 하여 종로구는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또 '웃대'는 청계천 상류 전체를 뜻하는 지명이어서 이곳만을 가리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 크다. 한편 주민단체인 '서촌주거공간연구회'에서는 서촌이란 명칭을 쓰는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현재 이 지역의 관광 정책상 명칭은 '세종마을'로, 금천교 시장도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로 명명하여 홍보되고 있다.

 

 

 

 

 

5. 인사동

행정동으로는 종로1·2·3·4가동에 속해 있으며, 주민센터는 종로1·2·3·4가동 주민센터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30길 47(익선동)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를 보면 문화의 거리를 중심으로 한 인사동은 다른 바둑판식 구역과는 달리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비스듬하게 구획되어 있다. 이는 조선시대 때 해당 지역에 작은 하천이 있었고, 이 내천을 따라 거리가 형성된 것이 현대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하천 자체는 근대에 들어와서 도로로 복개하면서 없어졌다.

 

 

@인사동길

인사동길

종로구 종로2가와 송현동 및 안국동 사이를 잇는 길로, 길의 이름은 이 도로가 지나가는 인사동에서 따왔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는 서울의 대표거리 중 하나로, 외국인들의 서울 관광 필수 코스이기도 하다. 낮 시간대는 관광 온 외국인들이 많기로 유명한 인사동길 쪽이 주력이다. 밤에는 음주가무를 위해 관철동(종각역 4번, 9번, 10번, 12번출구) 쪽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편인데, 바둑판식으로 잘 정리된 번화가에 인근 업무지구 직장인들의 비율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고 아주 중년 느낌이 드는 곳은 아니고 외국어학원이 많기 때문에 젊은 층 비율도 제법 된다. 특히 강북이나 경기북부에서 오기 괜찮은 접근성이라 그런지 주말의 경우 청년층 비율이 더욱 늘어나는 편이다. 한편 명동에서 북쪽으로 한블럭만 걸어가면 보이는 곳이라 명동에서 쇼핑하다가 술 마시러 넘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상권답게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으로, 유동인구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다른 상권들처럼 왁자지껄하지 않고 점잖은 편이다. 바로 앞에 흐르는 청계천도 꽤 운치있다. 지도에 표시된 지역 외에 낙원상가-탑골공원쪽 골목도 술집들이 꽤 있는데, 이 쪽은 노년층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태조때부터 충훈부, 이문 도화서가 인사동에 있었다. 인사동은 관가이면서 동시에 거주지였는데, 중인들이 많이 산 것으로 전해지지만 이율곡, 이완 장군, 조광조 등도 이곳에서 살았다. 그러다 1910년부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양반들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상류층이었던 북촌에 거주하던 양반 계층이 붕괴되었다. 이를 계기로 점차 상점화하기 시작한 점포들 중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경영되던 골동품상이 있었으며, 이곳에 의해 몰락하기 시작한 양반들 소유의 도자기와 고서화 및 고가구 같은 골동품들이 인사동에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들 상점들은 명동, 충무로의 상점들과 함께 문화재 수탈의 창구 역할을 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1930년대부터 인사동이 골동품의 거리로 유명해지게 되었으며, 경복궁 자리에 조선총독부가 만들어진 후에는 조선총독부와 가까이 위치한 인사동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의 고미술품들을 수집해가기도 했다. 또한 3.1운동의 대표적 본거지이기도 했는데, 현재까지도 3.1운동 유적지인 태화관(현 태화빌딩 자리) 터와 탑골공원, 숭동교회, 천도교회중앙대교당, 조선건국동맹터, 독립선언문 배부터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었던 골동품 상점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 초까지 성시를 이루었으나, 가짜 고서화사건과 금당살인사건 등으로 1970년대 말 장안동으로 이전하였다. 그 자리에는 미술 관련 상점(화랑, 표구점, 고미술품을 비롯한 미술품, 지필묵, 문화재 상점 등 -> 주로 1920년대에 충무로와 명동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상점들로,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싼 곳을 찾아 인사동으로 옮겨오게 되었다.)들이 들어섰다. 미술 관련 상점들이 즐비하다보니 자연스레 이곳에 전시장이 생겨났고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문화의 거리를 형성했다. 이로인해 인사동이 작가, 예술인, 미술애호가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면서 전통차, 전통음식 식당이 많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토속음식점과 전통찻집 등 유흥음식점들이 들어서면서 인사동은 더욱더 발전하게 되었다.

 

1987년에 인사전통문화보존회가 창립되었다. 정부에서도 문화거리를 양성하기 위해 1988년에 인사동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하고, 2002년4월24일에는 한국 제1호 문화지구로 지정하면서 인사동은 골동품점, 화랑, 도예점을 비롯한 공예품점, 지필방, 미술도구점, 한국요리와 전통찻집 및 전통 식당 등이 모인 전통문화거리로 변모하게 되었다. 

 

1999년7월부터 역사문화탐방로를 조성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어 2000년10월14일 완공되었는데, 보행자를 위해 차도의 너비가 줄고 인도는 넓어졌으며, 바닥에는 옛날식 기와와 재질이 같은 벽도을 깔아 고풍스런 분위기가 난다. 안국동 동쪽에 북인사 관광안내소와 북인사마당, 종로 쪽에 남인사관광안내소와 남인사마당이 있어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며, 이곳에서 각종 이벤트와 공연이 열린다.

 

덕수궁지구·명동지구·대학로지구·인사동지구 등 4개 지구의 8개 탐방로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엇으며, 탐방로별로 특성에 맞는 역사문화 행사와 도심을 순회하는 시티투어가 이어져있다. 한편 이곳도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하지는 못해서 인사동길의 터줏대감이었던 표구방과 갤러리 등이 밀려나고, 각종 화장품 가게 및 프랜차이즈 체인점, 싸구려 기념품점 등이 들어서고 있다. 몇 십년을 이어 온 노포들조차도 결국 상업화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인사동을 떠나는 일이 벌어질 정도다.

 

 

#전통문화의 거리

이거리는 현대식 건물과 전통이 함께 살아있다. 한국적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나는 거리로, 고미술품 상점, 화랑(갤러리), 전통찻집, 토속음식점 등이 밀집해있다. 그렇지만 이곳에 한국문화 상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느 곳에서 볼 수 있는 외국계 프랜차이즈도 자리 잡고 있는데 눈의 띄는 점은 인사동의 분위기와 어울리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스타벅스의 경우, 전국에서 유일하게 인사동에서만 자사의 간판을 한글로 부착해 한국적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그 외에 미샤, 스킨푸드, 에뛰드하우스 등 영어간판을 다는 로드샵들도 모두 한글 간판을 달고 있다.

 

#인사동 전통문화축제

인사동전통문화보존회와 종로구 주최로 1987년부터 해마다 4~5월 무렵에 인사동전통문화축제가 열려 한국전통예술경연·문화상품특별전 및 화랑 20개소에서 기획전시를 연다. 이 축제는 인사동 지역의 번영을 기원하는 장승제로 시작되며, 행사중에는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도 열린다. 고미술, 현대미술, 공예품 전시와 국악공연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갤러리

인사동에는 많은 갤러리가 밀집해있어 수많은 전시가 이곳에서 열린다. 무료전시도 많으니 미술에 관심이 많거나 북적이는 인사동 인파에 질렸다면 갤러리에 들어가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고미술품점, 공예품점, 골동품점, 화방

원래 인사동이 형성되기 시작할때부터 운영하던 점포들이 몇십년째 이곳을 운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부 점포는 전통기념품도 겸해서 판매하고 있는 중이다.

 

#쌈지길

인사동의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하고 있는 건물인 쌈지길은, 2004년 패션 기업 쌈지가 사업 다각화 과정에서 부동산 사업의 일환으로 지은 수공예품전문 쇼핑몰이다. 쌈지 부도 이후 운영은 부동산 관리 운영 전문 기업인 코어밸류에서 운영을 맡고 있다. 특이하게도 1층부터 4층까지 하나의 길로 이어져있는데, 계단도 있지만 계단없이도 쭉 이어진 오르막길을 따라 1층부터 4층 하늘정원까지 이동할 수 있다. 

 

#안녕인사동

2019년에 개장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여러모로 쌈지길과 비슷하지만 규모가 더 크다. 사진찍기 좋은 곳이 층마다 구성되어 있으며, 오근내닭갈비나 민속촌주막 등 인기식당도 다수 입점해있다.

 

#전통찻집과 전통음식점

 

#토인

오래된 문구점처럼 꾸면호은 가게로, 7080세대들이 향수를 느낄만한 추억의 불량식품 먹거리나 빈티지 종이인형, 구슬치기, 말인형 등의 옛날 장난감들을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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